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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를넘어콘텍스트로(한인문주의자의사회와교회읽기)

최종원   |   Jun 19, 2019
  • $32$20.8 (35 %)
  • BUSINESS DAY 1~2일 내 출고 예정
  • 주문수량 권(EA)
   
  • 페이지 : 358쪽
  • 무게 : 564g
  • 출판사 : 비아토르(주)
  • ISBN : 9791188255375
  • 상태 : 재고있음(3)
Overview

“텍스트에 갇힌 교회여, 광장으로 걸어 나오라!”
-성경 텍스트와 ‘지금’ 한국 사회라는 콘텍스트 사이의 다리 놓기


“오직 성경”, “오직 예수”를 부르짖는 한국 교회가 지금은 배제와 혐오의 중심에 서고 사회적 질타의 대상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는 한국 교회가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갇혀 그 텍스트가 구현되어야 할 우리 사회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텍스트에 갇힌 교회를 회복시킬 진정한 힘은 어디서 오는가? 이 책은 모든 것을 성경으로 환원하는 신학적 사유를 넘어 인문학적 상상력과 시선으로 교회와 사회를 바라볼 때 교회 개혁과 변화가 가능하며, 그 가능성은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쌓아 가는 데서 키워진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그 힘을 키우는 독법을 제시하는 한편, 인문주의의 시선으로 한국 기독교에 성찰점을 줄 만한 여러 역사의 사례를 검토하여 한국 기독교가 직면한 난제들을 헤쳐 나갈 길을 제안한다. 한국 교회의 현실과 관련한 주제들을 종횡무진 동서양 2,000년에서 끄집어내어, 성경의 텍스트와 한국의 콘텍스트가 만날 다리 놓기를 일관되게 시도한다.


책 속에서


성경 텍스트에 대한 재해석과 재발견이 교회를 회복시킨 것이 아니다. 텍스트의 가르침이 교회라는 공간을 넘어 대중이 살아가는 콘텍스트와 맞물렸을 때 비로소 새로운 교회가 탄생했다. 이러한 재탄생은 암흑과 같은 인고의 밤을 보낸 후에야 가능했다. 서로마 멸망으로 무너진 터 위에 유럽을 만든 베네딕트 수도회, 교회의 타락 앞에 사도적 청빈을 앞세우며 등장한 12세기 탁발수도회, 중세와 결별하고 새로운 근대를 추동한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과 가톨릭 트리엔트공의회, 극에 달한 부의 불평등으로 피폐한 대중의 분노를 프랑스와 같은 혁명이 아닌 ‘종교의 힘’으로 견인해 낸 18세기 영국의 메소디스트 운동,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절대절망을 넘을 빛을 제시한 20세기 제2차 바티칸공의회 등은 시대의 변곡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냈다. p.10-11


지금 한국 교회는 위험을 대면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 그 한 방편은 돈키호테처럼 가상의 적들을 만들고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이들의 무기는 모든 것을 신앙으로, 성경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신앙적·신학적 정통이라는 미명하에 횡행하는 이 환원주의는 내부 결집에는 효과적일지 모르나 위기를 헤쳐 가는 가장 게으른 방식이다. 창조과학이건, 이슬람 혐오건, 여성에 대한 차별이건, 한국 교회는 지금 그 모든 정당성을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라는 것으로 환원하고 있지 않은가. 이 틀 속에서 갖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사람을 질식시킬 수밖에 없다. 이 틀을 벗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엄정한 신학적 사유보다는 품이 넉넉한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p.23


교회란 무엇일까? 이는 신학적인 질문인 동시에 문화적·사회적인 질문이다. 초대교회는 낮은 자리로 내려와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공동체로 자랐다. 본회퍼 목사의 말처럼 타자를 지향하는 수도원 공동체였다. 우리는 제도 교회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답을 확인하거나 찾기보다, 답은 늘 바뀔 수 있는 유보적인 가치임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회 속에서 강자의 의지를 반영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보듬어 함께 가기 위해 기꺼이 변화를 선택하는 넉넉한 품을 지니는 일 말이다. 문제는 그 성취 방식에 있다. 깊이 있는 성경공부가 대안일까? 부정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성경의 가르침이 구현되어야 하는 콘텍스트에 대한 공부, 사회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타자를 만나고 이해하면서 축적하게 되는 절대적인 양의 경험만이 우리에게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 줄 수 있다. p.40


자신들이 설정한 신학적 틀 안에 갇혀 다른 생각에 대해서는 눈을 막고 귀를 닫는 것은 지적인 오만이자 태만이다. 종교에 초월의 영역이 개입된다고 해서 맹목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리의 정합성에 대한 최종 판단은 교의학자의 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교회가 속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교회의 가르침의 적실성을 인정할 때 교리의 정합성은 확정된다. 신학자들은 텍스트뿐 아니라 사회의 시각이 무엇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어깨의 힘을 빼고 열린 마음으로 콘텍스트를 읽는 노력이 그 누구보다 필요하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학문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p.179-180


토머스 모어가 추구한 유토피아의 핵심은 다름이 관용되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온전한 하나님나라를 꿈꾼다는 이들이 지금도 교회 강단에서, 학교 강의실에서 다름에 대한 혐오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핵심은 페미니즘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동성애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니다. 기독교의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정당화된다는 데 있다. 어떠한 이유이든 신앙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혐오를 정당화할 수 없다. 또한 학술적으로도 치열한 논쟁의 장이 되어야 할 대학에서 종교적인 도그마로 교수 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가로막는 것은 그 어떤 변명을 하든 용납될 수 없다. 다름의 문제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고민하며 해답을 찾아가야 하지, 혐오와 배제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 슬픈 역사의 반복을 끊어야 한다. p.213


불온하게 표현하자면 삶이 종교에 삼키어졌고, 사람들은 종교에 강박을 갖게 되었다. 내부에서는 이를 ‘경건’이라고 하나 외부에서는 ‘엄숙주의’라고 부른다. 흔히 생각하듯 일상이 거룩해야 할까?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가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것이 거룩일까? 어떤 이는 주일만 거룩하게 지키는 것을 위선이라 비판하고, 나머지 엿새도 주일처럼 살아 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나머지 엿새도 주일처럼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은 더 큰 위선이 아닐까? …그렇다면 일상의 거룩은 무엇일까?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큐티를 하고 성경공부로 일주일을 보내 주변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낸다는 식으로 암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삶은 주일의 위선을 주중으로 연장할 뿐이다. 오히려 일상의 거룩이나 영성은 매일의 삶, 타인과의 부딪침 속에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베푸는 일이다. 주일은 안식하며 삶에서 오는 수고를 내려놓고 서로 격려하며 재충전하는 축제여야 한다. p.302


출판사 리뷰


텍스트를 넘어서 콘텍스트로
자신의 주장을 지지할 근거로 성경 텍스트를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성경에서 답을 찾는다면서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상황, 즉 콘텍스트를 읽어 내는 데서 출발하지 않으면 교조적인 시각을 넘어설 수 없다. 텍스트 해석의 토대인 콘텍스트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만 텍스트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오직 성경, 오직 은총’은 자칫 이 땅의 이웃과 주변의 고통과 아픔을 효과적으로, 또한 정당하게 비껴가기 위한 도구로 왜곡될 수 있다. 성경으로 돌아간다면서 콘텍스트를 외면한 태도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를 넘어서 보편 교회로
담임목회자의 설교와 리더십이 대형 교회 형성에 큰 요인으로 작용하기에 담임목회자를 정점으로 하는 개교회 이데올로기가 형성된다. 이럴 경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장한 ‘우리’ 교회를 반대하는 일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행위로 인식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종교적 인종주의’의 덫에 걸려 있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 타종교 등 타자에 대한 배려를 교회에서 찾을 수 없다. 이는 초대교회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심각한 일탈이다. 오늘 기독교가 직면한 진정한 도전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이슬람, 동성애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 채 기독교의 외피를 입은 민족주의나 인종주의에 갇혀 있는 현실이다. 이제 우리 교회, 장로교회, 한국 교회를 넘어서 세계 교회, 보편 교회의 시각으로 콘텍스트를 들여다볼 때이다.

 

배제와 혐오를 넘어서 포용의 공동체로
사람들은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얻어지기에 인간의 의는 무익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신의 전적인 은혜를 소리 높여 외치는 개인이나 신학 부류가 이 땅에서 행하는 모습을 보면,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양파 한 뿌리의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뻔한 여인’과 흡사할 때가 많다. 구원이 은혜로 주어진다는 걸 믿는다면 다른 이를 정죄함으로 자기 구원을 정당화하는 행위는 모순이다. 심판은 우리 몫이 아니다. 우리 몫은 서로 영접하고 사랑하는 것이지, 구별하고 배타하는 것이 아니다. 나만 구원의 자격이 있고 다른 이에게는 없다고 외치는 순간, 우리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개인 신앙을 넘어서 공적 신앙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교리보다 공적 영역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이다. 우리의 신앙은 복음의 공공성을 이 사회 속에서 실현하는 것에서 드러나야 한다. 이제 우리의 고민은 ‘어떤 이념을 지킬까’가 아니라 ‘복음의 가치를 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실현할까’가 되어야 한다. 신앙이 사적인 것에만 머문다면 하나님과 사회 공동체와의 관계를 통한 신앙의 인격은 형성될 수 없다. 신앙이 인격적personal이면서 공적public인 가치임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사회의식・역사의식이다.


프롤로그: 인문주의로 교회를 읽는 이유


01 텍스트를 넘어서 콘텍스트를 읽다
나는 왜 인문주의자인가
교회여,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를 고민하라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성찰
부활의 현재적 의미
면벌부는 살아 있다
이제는 루터를 보내야 할 때


02 한국 교회를 넘어서 보편 교회를 고민하다
명성교회 세습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대중독재, 일상적 파시즘, 그리고 대형 교회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목회를 성직이라 믿는 이들에게
대형 교회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17세기 유럽 교회와 21세기 한국 교회의 평행이론


03 배제와 혐오를 넘어서 포용의 공동체를 향하다
‘가나안 성도’를 재고한다
그들만의 유토피아, 그리고 배제와 혐오
배제와 혐오가 생산해 낸 괴물
어떻게 이슬람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는가
종교인 과세와 차별금지법
개인의 영성을 넘어 형제애의 영성으로


04 개인 신앙을 넘어서 공적 신앙으로 살다
믿음과 불신 사이에 선 경계인
이제 인본주의자가 되자
개인의 욕망으로부터 소명을 해방하라
일상화된 엄숙주의를 넘어
그리스도인이여, 비판적 성찰을 하라
포스트모던 시대, 기독교 역사의식은 유효한가


에필로그: 개인을 넘어 공공을 지향하는 신앙